판문점 이야기
서울에서 북쪽 60km, 개성에서 동쪽 10km,
경기도 파주시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 위에 걸쳐져 있는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 입니다.
군사정전위원회는 1953년 10월 제25차 본희의에서 군사정전위원회의 원만한 운영을 위해서 군사정전위원회 본부 구역에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의 공동경비구역을 설정하기로 합의했고, 이 합의에 따라 동서 800m, 남북 400m에 달하는 장방형의 공동경비구역이 만들어졌습니다. 초기에는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경비와 관리를 공동으로 담당하는 말 그대로의 ‘공동경비구역’이었으나,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이후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이남 지역은 유엔군 측이, 이북 지역은 공산군 측이 분리 경비하게 되었습니다. 2018년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비무장화 및 자유왕래에 합의하였고, 이에 따라 JSA 감시초소 및 각종 화기가 상호 검증 아래 철수되어 비무장화 조치가 완료되었으며, 현재는 자유왕래를 위한 협의를 진행 중에 있습니다.
판문점 명칭 유래
한국전쟁 중 휴전 협상이 처음부터 판문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51년 7월 8일 휴전회담 예비회담은 개성 북쪽에 위치한 고급요리점 내봉장(來鳳莊)에서 개최되었습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주변 북한군이 의도적인 무력시위를 하는 등 회담장소의 중립성이 문제가 되자 유엔군 측은 1951년 9월 회담장소 이전을 공산측에 제의하였습니다. 북한군 측은 1951년 10월 7일 새로운 회담장소로 널문리 주막 마을을 제안하였으며, 유엔군 측이 이에 동의함으로써 회담 장소가 개성에서 널문리 마을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양측은 1951년 10월 22일 널문리에 천막을 치고 첫 연락장교 접촉을 가졌으며, 널문리를 새로운 회담장소로 하여 중단된 휴전회담을 재개하기로 공식 합의하였습니다.
1951년 7월 10일
'널문리'라는 지명에 대한 유래는 3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는 마을에 널빤지로 만든 대문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입니다.
두 번째 가설은 부근에 널문다리(판문교 板門橋)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입니다.
세 번째 가설은 지형이 워낙 넓어서 넓은 마을[里]이라는 뜻으로 넓은리가 널븐리 널문리로 변천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회담장은 널문리의 주막 겸용 상점 앞 콩밭에 지어졌습니다. 널문리가 정전협정 장소로 결정되면서 참전국인 미국과 중국으로 인해 각각 영어와 중국어 표기가 필요했는데, 중국어 표기를 위해 지명인 널문을 한자 판문(板門)으로 하고 회담장 부근에 있던 주막 겸용 상점에서 점(店)을 합성하여 ‘판문점(板 널빤지 판/門 문 문/店 가게 점)’으로 표기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판문점이라는 지명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1951년 10월
1952년 9월 18일 ⓒ NARA
1953년 10월
휴전회담은 본회의 159회를 비롯하여 총 765회에 이르는 각종 회의를 거쳐 드디어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던 판문점은 오늘날 판문점으로 불리는 공동경비구역에서 개성 쪽으로 약 1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휴전협정 성립 이후 군정위 양측이 정전협정 기구들의 회의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1953년 10월 군사분계선 상에 공동경비구역을 설정하면서 오늘날 판문점으로 불리는 지역이 생겼습니다.
현재 판문점 남측지역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에 속해 있고, 판문점 북측지역은 행정구역상 개성직할시 판문군에 속해 있습니다. 판문점은 비무장지대 내의 군정위 본부구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주민이 살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판문점 인근에 있는 대성동 마을은 북한의 기정동 마을과 함께 군정위 양측에 의해 한국전쟁 당시 주민에 한해 거주가 허용되었습니다.
판문점은 서울에서는 북방 약 60km, 평양에서는 남방 약 180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판문점의 지도상 좌표는 북위 37도 57분 동경 126도 40분입니다.
판문점 발자취
장벽을 넘어 ‘사람’이 넘나드는 통로
판문점은 휴전 이후부터 2000년대 동해선과 경의선 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남북 왕래가 가능한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전쟁 직후 판문점에서는 대규모 포로교환이 이루어졌습니다. 1953년 8월 5일부터 9월 6일까지 82,000여명의 북한군 및 중국군 포로가, 13,000여명의 유엔군 포로가 판문점을 통해 교환되었습니다. 또한 1985년 9월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남북 교환공연을 위한 예술공연단 참가자들이 민간 차원에서 최초로 판문점을 통해 남북을 왕래하였습니다. 1998년 6월 16일에는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5백 마리의 소를 실은 차량과 함께 북녘 땅을 찾아간 이른바 소떼 방북이 이루어졌습니다. 같은 해 10월 고 정주영 회장은 또 한 번의 소떼 방북을 진행하여, 두 차례에 걸쳐 총 1001마리의 소떼를 몰고 방북했습니다. 이러한 왕래는 2000년대 들어 동해선 육로나 경의선 육로로 대체되었습니다.
1953년 8월
1985년 9월 21일
1998년 6월 16일
군사적 공간에서 남북 간 대화와 접촉의 장소로
판문점은 1970년대부터는 남북대화와 접촉창구로서 기능이 시작되었습니다.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 예비회담을 시작으로 남북적십자회담, 남북군사회담, 남북경제회담, 남북체육회담 등 총 376회(2020년 6월말 현재)의 남북당국 간 회담이 판문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970~80년대 회담은 군사분계선 상에 위치한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중감위 회의실) 및 우리 측 자유의집과 북측 판문각에서, 1990년대 이후 회담은 우리 측 평화의집과 북측 통일각에서 주로 개최되었습니다.
1971년 8월 20일
1984년 11월 15일
2018년 1월 9일
한반도 평화를 견인하는 평화관광의 명소
2018년 들어 판문점은 평화의 초석을 다지는 역사적인 장소로 새롭게 조명되었습니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내 평화의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역사적인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판문점 선언은 명칭에 판문점을 명시함으로써 판문점의 역사에 평화를 만들어 가는 출발점이라는 새로운 명성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2018년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의 ‘9.19 평양공동선언’과 ‘9.19 남북군사합의’에 따라 ‘비무장지대의 실질적 비무장지대화’가 추진되었습니다. 2019년 6월 판문점은 다시 한 번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남ㆍ북ㆍ미 세 정상이 판문점에서 회동하고, 현직 미국 대통령이 북한 땅을 최초로 밟아 보는 이벤트가 펼쳐지면서, 판문점은 한반도 평화를 견인하는 상징적 공간이 되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던 평화의집, 북미 정상회동이 있었던 자유의집, 남북정상이 동행 산책을 했던 도보다리 등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방문할 수 있는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2018년 4월 27일
2018년 4월 27일
2019년 6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