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적십자 파견원 접촉 (1971.8.20-1971.9.16, 5회, 중감위회의실)
1971년 8월 2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남측의 이창열, 윤여훈과 북측의 서성철, 염종련이 만나게 됨으로써 남북 쌍방 적십자간의 첫 파견원 접촉이 이루어졌습니다.
1971년 8월 20일
1971년 8월 2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남측의 이창열, 윤여훈과 북측의 서성철, 염종련이 만나게 됨으로써 남북 쌍방 적십자간의 첫 파견원 접촉이 이루어졌습니다.
회담에서 한적은 판문점 지역에 쌍방의 상설연락사무소 설치와 연락관의 상주, 그리고 쌍방 연락사무소간을 연결하는 직통전화의 가설·운영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북적이 이에 동의함으로써 1945년 남북 분단 이후 26년만에 전화 연결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남북조절위원회 남측은 1973년 11월 15일 전화통지문을 통해 남북조절위원회 제4차 회의의 조속한 개최를 촉구하면서 만약 남북조절위원회 개편이 필요하다면 양측 간사위원간의 접촉을 통해 이를 토의할 것을 제의하였습니다. 이에 쌍방은 남북조절위원회의 개편 문제를 포함하여 위원회 재개에 필요한 문제들을 토의하기 위한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회의를 판문점에서 갖기로 합의하였습니다. 부위원장 회의는 1973년 12월 5일부터 1975년 3월 14일까지 10차례 판문점 자유의집과 판문각에서 번갈아 개최되었습니다.
1974년 5월 22일에 개최된 제6차 남북적십자 대표회의의 합의에 따라 1974년 7월 10일부터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개최된 쌍방교체수석대표를 책임자로 하는 실무회의에서는 본회담 의제와 본회담 재개문제를 토의하였습니다. 실무회의는 1977년 12월 9일까지 3년여에 걸쳐 25차례 진행되었습니다.
북한은 1979년 2월 20일 북한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 김유순과 북한탁구협회 회장 김득준 명의로 박종규 대한체육회 회장과 채영철 대한탁구협회 회장 앞으로 보내는 서한을 방송을 통해 발표하였습니다. 이 서한에서 4월 25일 평양에서 개최하는 제3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한이 단일팀을 구성하여 출전할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남북탁구협회 대표들이 판문점에서 만날 것을 제의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남북탁구협회 회의가 1979년 2월 27일부터 3월 12일까지 중감위회의실에서 4차례 진행되었습니다.
북한은 신현확 국무총리 앞으로 보내는 이종옥 정무원 총리의 서한을 통해 「남북총리회담」을 제의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신현확 국무총리는 1980년 1월 24일, 남북총리회담 준비를 위한 차관급 수석대표를 포함한 3명의 실무대표와 수행원으로 실무대표단을 구성하여 1980년 2월 6일 판문점 자유의집 또는 쌍방이 합의하는 장소에서 접촉을 가질 것을 제의하였습니다.
북한은 우리측 제의에 동의하면서 회담장소는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로 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로써 남북총리회담을 위한 실무대표접촉이 1980년8월 20일까지 10차례 진행되었으나, 북한은 제11차 실무대표접촉을 이틀 앞둔 9월 24일 방송을 통해 실무대표접촉의 중단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남북직통전화마저 두절시켰습니다.
북한은 1984년 3월 30일 김유순 북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명의로 된 서한을 정주영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앞으로 보냈습니다. 이 서한에서 북한은 "제23회 국제올림픽경기대회와 그 후에 있게 될 아시아 및 세계선수권대회에 북과 남이 유일팀을 구성하여 출전할 것"을 제의하고 빠른 시일내에 쌍방 체육대표단이 판문점에서 회담을 가질 것"을 제의하였습니다.
이에 대한체육회는 제23회 로스엔젤레스 올림픽대회 참가선수 명단 제출마감일이 불과 2개월 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단일팀 구성 문제를 협의·해결하는 것이 기술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하였으나, 이를 남북간의 인적·물적 교류와 협력증대의 계기로 삼기 위해 4월 2일, ①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대회, 1986년 아시아 경기대회,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를 비롯한 앞으로 있을 국제체육경기대회에 참가할 남북단일팀을 구성하는 문제 ② 남북체육교류를 실시하는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한 회담을 4월 9일 판문점에서 가질 것을 제의하였습니다.
북한이 이에 호응해옴으로써 남북체육회담이 1984년 4월 9일부터 5월 25일까지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3차례 개최되었습니다.
1984년 10월 12일 신병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은 북한의 최영림 부총리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필요하다면 남북한간의 교역과 경제협력을 추진하는 상설기구로서 쌍방 당국과 경제계 대표들로 구성되는 남북한 경제협력기구를 설치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히고, 이상과 같은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차관급을 수석대표로 하여 남북한 경제당국 및 민간 경제단체 대표들이 참가하는 남북경제회담 개최를 제의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북한은 1984년 10월 16일 김환 부총리 명의 서한을 통해 우리측의 경제회담 개최제의에 호응함으로써, 분단 40년만에 처음으로 남북한간 경제분야의 회담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남북국회회담 준비접촉은 김재순 국회의장이 국회를 대표하여 「서울올림픽대회에의 북한참가 촉구 결의문」을 담은 서한을 1988년 7월 18일 양형섭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에게 발송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북한은 7월 21일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 명의로 8월중 제1차 남북국회연석회의를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제의하는 서한과 함께「남북불가침에 관한 공동선언」초안을 보내왔습니다.
이에 남북 쌍방은 1988년 8월 19일부터 1990년 1월 24일까지 10차례의 남북국회회담 준비접촉을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진행하였습니다.
1988년 12월 28일 강영훈 국무총리는 연형묵 북한 총리에게 보내는 서한을 통해 남북한간 제분야에서의 상호 신뢰구축과 긴장완화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협의·해결하기 위한「남북총리회담」개최를 제의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1989년 1월 16일 연형묵 북한 총리는「남북고위급 정치·군사회담」개최에 동의하면서 이를 위한 예비회담을 동년 2월 8일에 갖자고 제의해 옴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남북한 쌍방은 1989년 2월 8일부터 1990년 7월 26일까지 8차례의 예비회담과 2차례의 실무대표접촉을 판문점 평화의집과 통일각에서 번갈아 개최되었습니다.
1988년 12월 21일 북한올림픽위원회 김유순 위원장이 김종하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제11회 북경아시아경기대회에 남북단일팀을 구성·출전하는 문제를 협의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측이 호응하면서 1989년 3월 9일부터 1990년 2월 7일까지 9차례의 남북체육회담 본회담과 6차례의 실무대표접촉이 판문점 평화의집과 통일각에서 번갈아 개최되었습니다.
북한은 1985년 12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10차 남북적십자 본회담 이후 우리 측의 거듭된 회담재개 촉구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속 외면해 오다가, 1989년 5월 31일 갑자기 제2차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 문제 협의를 위한 남북적십자 실무 대표접촉을 갖자고 제의해 왔습니다.
이에 대해 한적의 김상협 총재는 6월 12일 북적 측 제의를 원칙적으로 수락하는 전화통지문을 보냈으며, 그 이후 쌍방간에 여러 차례 통지문 교환을 통해 실무대표접촉을 9월 27일 가질 것에 합의하였습니다. 남북적십자 실무대표접촉은 1989년 9월 27일부터 1990년 1월 8일까지 8차례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개최되었습니다.
남과 북은 북경아시아경기대회 기간중 남북공동응원 등 민족의 화해와 단합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1990년 9월 23일 북경에서 쌍방 체육장관(남:정동성, 북:김유순)간에 접촉이 이루어졌습니다. 접촉에서 쌍방은 남북통일축구대회 개최에 원칙적으로 합의하는 한편, 바르셀로나 올림픽경기대회 등 주요국제경기대회의 단일팀 구성·참가와 남북체육교류 문제 등을 협의하기 위한 남북체육회담을 조속한 시일내에 개최키로 합의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남북체육회담이 1990년 11월 29일부터 1991년 2월 12일까지 4차례 진행되었습니다.
핵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남북대표접촉이 1991년 12월 26일부터 31일까지 판문점에서 3차례 진행되었습니다. 쌍방대표들은 한반도의 비핵화를 통하여 핵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고 조국의 평화와 평화통일에 유리한 조건과 환경 마련을 위해 비핵화 공동선언에 대한 내용을 진지하게 토론하고 합의서에 가서명하였습니다. 이후 남북고위급회담 비핵화공동선언 문본 교환을 위한 대표접촉이 2차례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개최되었습니다.
황인성 국무총리는 1993년 5월 20일 전화통지문을 통해 핵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고위급회담 대표접촉을 갖자고 제의하였습니다. 북한측은 9월 1일 남북고위급 회담 북한측 대표단 대변인 담화를 통해 특사를 쌍방 최고책임자가 임명하는 임의의 급으로 하며, 의제에 있어서 비핵화 문제 및 긴장완화와 남북합의서 이행을 위한 공동대책 문제를 우선적으로 논의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 측은 9월 2일 국무총리 명의의 전화통지문을 통해 핵문제를 최우선적으로 협의·해결하고 그 밖의 남북간 협의 문제들을 함께 다루기 위하여 쌍방 최고책임자가 임명하는 특사를 교환하자고 밝히고, 실무대표접촉을 9월 7일 갖자고 제의하였습니다. 북한측은 10월 2일, 접촉일자를 10월 5일로 수정 제의함으로써 남북특사교환을 위한 실무대표 접촉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남북특사교환을 위한 실무대표접촉이 1993년 10월 5일부터 1994년 3월 19일까지 8차례 판문점 평화의집과 통일각에서 번갈아 개최되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2월 25일 취임사와 1994년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김일성 주석과 만날 용의가 있음을 천명하였습니다. 한편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한 후 김영삼 대통령을 면담(1994.6.18)한 자리에서 "김일성이 김영삼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제의에 호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습니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은 한반도 위기상황을 해결하고 남북관계 개선을 도모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든 조건없이 김일성 주석을 만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는 1994년 6월 20일 이영덕 국무총리 명의로 북한 강성산 정무원 총리 앞으로 전화통지문을 보내, 남북정상회담 개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예비접촉을 6월 28일 판문점에서 가질 것을 제의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북한은 6월 22일 강성산 정무원 총리 명의의 전화통지문을 통해 이에 동의함으로써, 남북정상회담 개최의 절차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부총리급 예비접촉이 1994년 6월 28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예비접촉에서 남북정상회담을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하였으나 김일성 사망(7.8)으로 무산되었습니다.
김대중대통령 특사인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과 북측의 송호경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은 2000년 4월 8일 비공개 접촉을 갖고 남북정상회담을 2000년 6월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4.8 남북합의서’에 따라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따른 절차문제 협의를 위한 준비접촉이 판문점에서 2000년 4월 22일부터 5월 18일까지 5차례 개최되었습니다.
2000년 9월 25일부터 26일까지 제주도에서 열린 제1차 남북국방장관회담에서의 합의에 따라 조성태 국방부장관은 2000년 10월 7일 김일철 북측 인민무력부장에게 서한을 보내 제1차 남북군사실무회담을 10월 13일 개최하자고 제의했습니다.
남북 쌍방은 제3차 남북철도·도로연결실무접촉(2002.12.15-17)에서 철도·도로 연결에 필요한 자재 장비와 개성공단 건설에 필요한 인원과 장비의 수송을 위한 임시도로를 개성공단 착공 전까지 개통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남북은 2003년 1월 27일부터 12월 23일까지 군사실무회담 2차례, 군사실무접촉 4차례를 판문점 평화의집과 통일각에서 진행하였습니다.
제7차 남북군사실무접촉(2003.1.27.)에서는 「동·서해지구 남북관리구역 임시도로 통행의 군사적 보장을 위한 잠정 합의서」를 채택·발효시켰으며, 또한 제9차 남북군사실무회담(2003.12.23.)에서는 「동해 지구와 서해지구 남북관리구역 경비초소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발효시켰습니다.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2005.6.21~24)에서 합의된 제3차 남북장성급군사회담 개최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남북군사실무대표회담이 7월 20일부터 11월 3일까지 3차례 평화의집과 통일각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남북 쌍방은 회담에서 제3차 장성급군사회담 일정문제와 함께 2004년 6월 4일 합의한 '서해해상에서 우발적 충돌방지와 군사분계선 지역에서의 선전활동 중지 및 선전수단 제거에 관한 합의서'의 완전한 이행문제 등에 논의하였습니다.
제5차 남북장성급군사회담이 2007년 5월 8일부터 5월 11일까지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개최되었습니다. 남북 쌍방은 '남북열차시험운행의 군사보장합의서'를 타결ㆍ발효시키고, 5개항의 공동보도문에 합의했습니다. 이로써 2007년 5월 17일로 예정된 열차시험운행을 군사적으로 보장함으로써 50여년만에 남북간의 철길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2013년 6월 9일부터 10일까지 판문점에서 남북당국간 실무접촉을 진행했습니다. 실무접촉을 통하여 남북당국사이의 회담을 2013년 6월 12일부터 13일까지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하고 개성공단 정상화 문제, 금강산관광 재개 문제, 이산가족상봉을 비롯한 인도주의 문제 등 당면한 긴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를 협의하기로 했습니다.
남과 북은 2014년 2월 5일 판문점 통일각에서 남북적십자 실무접촉을 진행하였습니다. 남북 쌍방은 실무접촉에서 2014년 2월 20일부터 25일까지 금강산에서 남북 각각 100명씩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남북고위급회담이 2018년 1월 9일 판문점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회담에서 쌍방은 북측의 평창동계올림픽·패럴림픽 참가, 한반도 군사적 긴장상태 완화와 평화환경 마련을 위한 공동노력, 한반도의 모든 문제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 등을 담은 3개항의 공동보도문으로 발표하였습니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습니다. 남북 정상은 '한반도 평화시대' 개막을 선언하고, 남북관계의 전면적·획기적 발전, 군사적 긴장완화와 상호 불가침 합의,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및 평화체제 구축 등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협의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정상회담의 결과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에 서명한 뒤 공동 발표 하였습니다.